서브컬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합니다. 최근 국내 서브컬처씬의 동향은 어떤가요?

비슬라 (권혁인 편집장)

물리적인 장소보다는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디지털 플랫폼과 개인 또는 집단적인 움직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을 통해 벌어지는 일들의 빈도수나 힘이 약해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지역 내부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많은 이들이 이태원을 가리켜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코로나 시기를 지난 뒤 최근 이태원의 동향에 대해 직접 경험하신 바 또는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태원에 살고 이태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올해 초까지는 길거리가 굉장히 횅하더라고요. 그래도 최근에는 제법 사람이 모이고 상권도 회복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다만 장사를 20년 넘게 해오신 한 사장님이 ‘다음에는 뭐가 터질지 무섭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무거운 마음은 여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다른 한편으로 이태원은 외부 방문객이 많은 동네인데, 정작 이태원 로컬이라고 볼 수 있는 분들의 책임이 아닌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에서 일종의 답답함도 어느 정도 느낄 수밖에 없고요. 저희 입장에서는 이태원에서 대규모 이벤트를 만들어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게 아무래도 안타까운 점입니다. 2016년부터 꾸준히 참여해서 함께 만들어 온 이태원지구촌축제의 올해 개최 여부도 여전히 불확실하고요. 올해 할로윈은 당연하게도 추모의 분위기로 보내게 되겠죠.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태원에서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기획을 내는 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광극장이 위치한 보광동은 이태원 권역 안에서도 마을의 정취가 굉장히 뚜렷한 곳입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며 경험한 보광동은 어떤 동네였나요?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정말 많은 요소를 품은 동네죠. 우선 외국인 가족 또는 귀화 가정이 많다 보니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저 역시 다른 곳에 살다가 보광동에 정착한 경우라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한국말이 서툴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드는데, 막상 입을 열면 친구들과 찰지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영락없는 초등학생, 중학생이에요. 그래서인지 저희가 중학교 연극 수업을 나갔을 때도 느끼지만, 이 동네 아이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 없이 모두 함께 어울려 지내는 데 익숙합니다. 한편 저렴한 월세로 사는 젊은이들이 많은 반면 부자 어르신들도 많이 살고 계세요. 아무래도 겉보기엔 다소 낡은 동네의 느낌이지만 재개발 대상 지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정말 오래된 건물이 많고, 도로 상태도 좋지 않고, 주차도 제멋대로 하는 느낌이지만, 막상 집값이 폭등하여 부자가 된 분들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빈자, 예술가와 상인, 백인과 흑인, 온갖 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공존하는 독특한 동네입니다.

앞선 질문과 관련해서 보광극장의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이 있나요?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현재 보광극장의 대표작은 작년 10월에 무대에 올린 <살고 있어요, 보광동에>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가 보광동 골목에서 극장을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지역 주민분들께서는 드물게 극장을 방문하시는 편이에요. 이른바 ‘고정 관객’이라고 말씀드릴 만한 분들이 없는 건데요. 지역과의 소통을 더욱 늘려 나가고자 하는 저희의 자체적인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주민분들의 이야기를 담아 만든 작품입니다. 대략 6개월 정도 인터뷰하면서 준비했는데요. 거절하시는 분들이 많아 힘들기도 했지만 재밌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공연에 대한 반응도 굉장히 좋았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을 공연에 초대했는데 감사하게도 실제 관람해 주신 분들이 계셔서 뿌듯했던 기억도 있네요. 다른 대표작으로는 <장문로41가길>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은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린 곳의 실제 주소명이고요. 극장도 아닌 공간에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 그리고 꿈과 현실을 그려낸 작품의 스토리가 인상적이기 때문인지 많은 분께 성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지금의 극장 주소인 <장문로19길 4>란 이름으로도 추가 공연을 진행했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린 작품입니다.

장기간에 걸친 셧다운의 후유증인지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다소 경직된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건축가의 관점에서 코로나 이후 체감하고 계신 공간 이용 패턴의 변화가 있을까요?

마하 한남 (김동현 소장)

제가 무언가를 예약제로 이용하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원래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들도 예약 시스템을 갖춘다거나 인원 제한 등을 두고 운영하기 시작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한 겹의 절차가 추가된 건데 그 장점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공간이든 특별한 절차 없이 오픈해 두면 공간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인 인원수는 크게 늘어나겠지만, 질적으로 좋은 경험을 누리고 가는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거든요. 그래서 공간을 온전하게 즐기도록 하는 운영 관점에서나 안전을 유지하는 측면에서 일종의 절차를 두는 것에 대해 이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클럽씬부터 다채로운 글로벌 식문화 등 이태원은 다양한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이태원 하면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PDF 서울 (이승현 대표)

‘Nightlife’ 밤을 빼고 이태원을 얘기할 수 없죠.

이태원 지역에서 가장 즐겨 찾으시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요?

비슬라 (권혁인 편집장)

가장 좋아하는 곳은 클럽 cakeshop입니다. 제 20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클럽입니다. 이곳은 저뿐만 아니라 소위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을 사랑하는 이들의 터전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데요. 정말 수많은 로컬/해외 아티스트가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10년이 넘도록 cakeshop이 지켜온 방향성은 서울에서 누구나 시도해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기에 용감하고 대단한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비롯한 여러 악조건 속에 이태원 지역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의견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직접 지역 내에서 활동하고 계신 입장에서 이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블리스풀 바버샵 (동혁, D2, 선우 원장)

어느덧 참사 이후로 1년이 다 되어 가는 데 우선은 정말 안타깝죠. 안 그래도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를 비롯한 사건·사고가 발생했잖아요. 그때는 정말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막막했고 지역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정말 무거워졌습니다. 미디어에서도 이태원 일대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보도를 연일 내놓는 것에 다소 섭섭한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태원 모든 상인분들께서 정말 진심으로 노력하고 계시거든요. 정말 피땀 어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 많은 분들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고요. 당장은 다소 어렵지만 노력하다 보면 다시 예전의 이태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다이닝 바 & 클럽’이란 통상적인 분류로는 볼레로를 온전하게 설명하기에 다소 애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시점 기준, 볼레로를 어떤 공간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요?

볼레로 (손기정 대표)

대외적으로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좋은 노래들을 소개하는 뮤직바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카바레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이고요. 국내에선 카바레라고 하면 성인 유흥 업소로 인식이 좋지 않은데, 사실 그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카바레는 그야말로 사교의 장이었거든요. 볼레로 역시 업종과 배경, 취향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와서 좋은 음악 듣고 칵테일 마시면서 교류하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더없이 행복한’이란 메시지를 다양한 온라인 게시물을 통해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애티튜드나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되는지 궁금합니다.

블리스풀 바버샵 (동혁, D2, 선우 원장)

Happy, Bless, Bliss 모두 행복을 뜻하지만 ‘Blissful’은 그걸 넘어 더없는 행복을 의미하거든요. 동혁 바버가 어린 시절부터 그 단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개인적인 신조랄까요?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단어 같은 건데, 어느 정도냐면 블리스풀이란 단어를 손에 타투로도 새겼을 정도입니다. 바버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손님들께 제공하는 서비스 그 이상의 행복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저희 나름의 약속이기도 하고요. 스스로도 더없이 행복하게 일하자는 일종의 다짐을 담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이태원 지역의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나영롱킴 (나나영롱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자유로워 달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딱 그거야! 계속 이렇게 네 맘대로 살아라, 이태원아!”

일상적인 소재를 해체하고 조합하여 독창적인 결과물로 완성하시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영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얻고 계신가요?

길종상가 (박길종 대표)

이곳저곳 산책하는 길 위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데요. 특히 동네 골목길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갖고 나와 앉아 계시는 의자나 사용하시는 물건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등받이가 부러진 의자를 끈이나 철사를 덧대어 수선하신 모습을 보면 생활에서 나오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방식이 작가들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이나 생각을 적어뒀다가 어떻게 이미지로 구체화할지 천천히 생각해보곤 합니다.

헬카페 로스터즈는 보광동에 자리를 잡았는데요. 첫 매장을 오픈하는 동네로 보광동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울러 이후 타 매장 역시도 모두 용산구 일대에 선보이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헬카페 (임성은 대표)

당시 카페 하면 홍대였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동업자도 홍대에서만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상권이 포화상태이기도 했고 그런 곳에서 우리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가 다소 의문이었어요. 그러면 다른 동네는 어디가 적합할까 싶었는데, 저희가 술 마시려고 이태원을 종종 드나들 때였거든요. 이태원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적당한 공간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헬카페 로스터즈 자리가 보증금과 월세 모두 부담이 없어서 보광동에 첫 매장을 내게 되었고요. 이후에 용산구 일대에 매장을 낸 이유도 단순했습니다. 다른 동네를 알아보다가도 굳이 먼 곳으로 출퇴근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군요. 매장 관리나 직원 교육이 편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나중 일이었고요.

많은 이들이 이태원을 가리켜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코로나 시기를 지난 뒤 최근 이태원의 동향에 대해 직접 경험하신 바 또는 생각이 궁금합니다.

비슬라 (권혁인 편집장)

이태원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식고 또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분출되는 곳이기에 지금 한 시점을 두고 속단하기엔 이르며, 아직 좀 더 함께 흘러가며 경험하고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성원이 종교 시설로만 기능한다기보다는 마치 무슬림 생활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네요.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이주화 이맘)

합동 예배가 있는 금요일마다 정말 많은 무슬림들이 성원을 방문합니다. 평균적으로 1,200~1,300명 정도가 방문하고 있고요. 1년에 두 번 있는 축제 예배 때는 3,000~4,000명씩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성원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겠고요. 커뮤니티의 구심점과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근에서 친숙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고향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모국어도 자유로이 쓸 수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그런 무슬림 타운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선테일러 (이생로 대표)

좋아했죠.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교복도 양복점에 가서 맞춰 입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패션에 단순히 관심이 있는 것과 양복점을 운영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요. 본업이었던 호텔 분야에서는 제가 석사, 박사였지만 옷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건 잘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제는 40년 넘게 시간이 흘렀다 보니 도사가 됐습니다. 누구든 매장을 방문하시면 곁눈질만 해도 단번에 사이즈를 알 수 있어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하는 스토어의 특성상 코로나 시대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웝트샵이 전개하고 있는 활동과 그 방향성이 코로나 전후로 바뀐 부분이 있을까요?

웝트샵 (이석준 대표)

크게 바뀐 건 없습니다. 지인 브랜드가 아니면 팝업도 잘 진행하지 않을 정도로 다소 폐쇄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인지 운영 방향의 큰 변화는 없었는데요. 다만, 이벤트를 진행하는 빈도는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주변에서 ‘너희는 뭐 좀 해라’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 통에 파티를 비롯한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고요. 아는 동생들이 웝트샵에 놀러 오는 느낌으로 디제잉 파티를 한다거나, 자체적으로는 그런 소소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태원 지역에서 40년 넘게 영업해 오셨습니다. 선테일러를 운영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선테일러 (이생로 대표)

지금 생각해 보면 성장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신문 배달하며 공부한 덕분에 자연히 영어 실력을 갖출 수 있었는데요. 이후 군 생활을 마친 뒤 어학 능력을 살려 미군 부대에서 통역 업무를 하게 됐죠. 그러다 군부대 밖에서 사회 활동을 해야 성공할 수 있겠다 싶어 호텔 근무를 시작했는데, 그때 일종의 서비스 정신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손님분들을 응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한 사업이 바로 선테일러였습니다.

볼레로의 무드는 클래식 바에 비하면 비교적 산뜻한 느낌이고, 기존의 클럽에 비하면 어느 정도 드레스업이 필요한 듯한 느낌입니다. 지금의 공간을 구성하며 중시하신 부분, 아울러 방문객이 어떤 방향으로 공간을 누리길 희망하셨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볼레로 (손기정 대표)

지방 출신으로 처음 상경해서 일했던 곳이 클래식 바였는데요. 그때 느꼈던 특유의 중후한 분위기와 문화를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언더그라운드 느낌이 물씬 나는 이태원 클럽들의 매력에 심취했고요. 앞서 언급한 클래식 바와 언더그라운드 클럽의 분위기는 상반되는 편이지만, 바로 그 대비되는 개성과 매력에 모두 이끌렸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상반된 두 가지 성향이 결국 볼레로의 톤 앤 매너를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은 다소 클래식한 느낌이지만 언더그라운드적인 요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요소는 음악과 오시는 손님들이 채워줄 것으로 판단했거든요. 결과적으로 클래식한 디자인을 지향하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블리스풀 바버샵은 어떤 공간인가요?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블리스풀 바버샵 (동혁, D2, 선우 원장)

블리스풀 바버샵은 기본적으로는 맨 스타일링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용샵이지만, 나아가서 저희는 안식처와 같은 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발만 하고 가는 것보다도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털어내실 수 있도록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실제로 고객분들이 저희 바버들과 개인적인 얘기도 많이 나누면서 힐링하러 오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마치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살롱에 가까운 공간이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뒤로 하고 맞이한 사실상 첫해였습니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사실 요즘 보광극장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살고 있어요, 보광동에>란 작품을 공연할 때 용산교육복지센터에서 일하고 계신 분께서 공연을 좋게 보시고는 인근의 오산중학교 선생님께 보광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게 연이 되어 학생들에게 연극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지역 극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져가기 위해서는 그런 활동에 집중하는 게 아주 좋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저희 단원들의 경우 연기 활동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게 당연하거든요. 그래서 극단으로서의 활동을 중시할지, 아니면 지역 극장으로서의 활동에 집중할지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 중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 서브컬처 씬 내 이태원역 주변, 한남동, 보광동, 해방촌 등을 아우르는 소위 ‘이태원 권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태원’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중심으로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웝트샵 (이석준 대표)

이태원을 처음 방문했던 건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서태지가 신고 나왔던 에어포스 신발을 사고 싶었는데, 그걸 구매할 수 있는 게 이태원 뒷골목이어서 처음 가보게 되었죠. 이후에도 청소년기 저에게 이태원은 옷 사러 가는 곳이었고요. 그러다가 군 전역 후 20대 후반에 이태원을 다시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에는 역시 클럽을 자주 오갔는데, 역시 이태원은 클럽 문화가 강한 곳이죠.

소위 이슬람교에 대한 두려움은 낯섦과 무지로부터 비롯되기도 합니다. 말씀해 주신 굵직한 사건들이 이슬람의 이름 아래 전개된 영향도 있겠고요.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이주화 이맘)

이슬람에 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식어가 ‘오해와 편견’입니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써 전 지구적인 이웃 종교로 널리 자리 잡고 있고, 다른 무엇보다도 평화와 평등의 가치를 설파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가치가 어느 국가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무슬림이 생겨나고 점차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죠. 이러한 교리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이슬람교는 오히려 유연하고 변화에 적극적인 종교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서울중앙성원은 이태원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지켜봐 왔습니다.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태원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이주화 이맘)

1990년대까지도 성원 주변은 소위 ‘텍사스촌’으로 불리는 미군 대상의 위락지구였습니다. 이슬람 지구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도 아닌 다소 험한 동네의 느낌이 강했죠.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이슬람 성원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슬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특히 이슬람권 국가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공관과 그 공관에서 일하는 공관원, 상사 주재원 등이 인근 지역에 다수 정착했습니다. 아울러 미군 부대 이전이 진행되면서 이태원 소방서부터 성원까지 오는 길에 가득했던 위락 시설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이슬람 관련 식당이나 상점이 채웠는데요. 결과적으로는 무슬림들이 종교 활동차 성원을 방문했다가 인근 식당을 이용하거나 식료품을 구매하는 등 일종의 상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구청 차원에서도 이슬람 거리를 조성한 뒤 인근 환경을 정비하기도 했고, 무슬림 해외 관광객 사이에서는 성원 주변 지역이 필수 관광 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태원은 성, 종교, 문화적 소수자들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을 두고 활동해 온 지역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대표님께서는 이태원 권역의 지역적 의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울프소셜클럽 (김진아 대표)

이방인들의 고향 같은 동네죠. 저도 서울 사람이 아니라 지방에서 상경해 대학에 들어가고 일해왔던 사람이라서 언제나 이방인으로 살아왔는데요. 아무리 강남에서 오래 지내도 지역에서 환영받는다는 감정이나 소속감을 느끼긴 어려웠어요. 서울은 항상 누군가를 밀어낼 준비가 돼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강남은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니까요. 그래서 이태원으로 왔을 때 이방인들이 모여 서로를 조금 더 챙겨주고 관심을 갖는 모습들이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이곳에 찾아오게 되었고, 나아가 여기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10년간의 영업 기간 동안 국내 커피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최근 국내 커피 업계의 동향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인상적인, 혹은 주목할 만한 브랜드 또는 경향성이 있을까요?

헬카페 (임성은 대표)

10년 사이에 전반적으로 커피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왔고요. 대부분 훌륭한 맛의 커피와 즐기기 좋은 공간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예전에 비해 뾰족한 개성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실패할 만한 시도를 과감하게 하는 곳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그렇다 보니 여러 카페들이 비슷비슷해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감히 뭐라고 얘기하기가 어려울 만큼 커피 시장이 크게 성장해 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코드숍의 대표이기 이전에 DJ로서 굉장히 오랜 기간 활동해오셨습니다. 앞선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턴테이블을 활용한 바이닐 플레이와 디지털 플레이어를 활용한 디제잉 역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웰컴레코즈 (DJ ANDOW)

저는 2004년부터 DJ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대략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바이닐로만 플레이하다가 2010년부터 CDJ와 같은 디지털 믹싱 장비가 보급되면서 두 방식 모두 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19년부터는 다시 바이닐 위주로 음악을 틀고 있고요. 비유하자면 바이닐로 플레이하는 건 수동 미션 자동차를 운전하는 느낌, 디지털 믹싱은 자율주행 자동차를 운전하는 느낌이랄까요? 바이닐로 디제잉할 때는 정말 많은 요소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LP와 맞닿는 바늘을 어떤 걸 쓰냐에 따라서도 나오는 소리가 달라지고요. 한 노래를 다른 노래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비트매칭 과정에서도 박자 등의 정보가 계기판에 모두 뜨는 디지털 믹서와 달리 바이닐로 틀 때는 온전히 귀로 듣는 감각에 의존해야 하거든요. 그런 요소들을 온전히 고려하며 음악을 튼다는 느낌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의 이태원 지역의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슬라 (권혁인 편집장)

전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겪는 문제인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조화롭게 지역이 자리잡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업무 복장 자율화 등으로 인해 정장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정장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 분명 존재할 것 같은데요.

선테일러 (이생로 대표)

이게 얼마나 재밌냐면요. 다소 누추하게 왔다가도 제작한 양복을 갈아입고 멋있게 꾸미면 나갈 때는 신사가 되거든요. 걷는 자세, 서 있는 자세부터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그만큼 입는 옷 자체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데, 양복 맞춤 정장은 입는 것만으로도 격식과 품위를 만들어 준다는 매력이 있죠. 그리고 양복점을 하다 보면 손님들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새 옷을 입었을 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저 역시 매 순간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이태원에 양복점을 내신 것 역시 아무래도 그런 어학 능력의 영향이 컸을까요?

선테일러 (이생로 대표)

물론이죠. 이태원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 방문객이 많은데, 아무래도 어학 능력이 있다는 건 무기를 갖추고 있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리고 양복점은 제가 종사하던 호텔업과도 서로 공유하는 일종의 속성이 있습니다. 손님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응대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정말 중요하다는 부분이죠. 이를테면 독일 손님이 오셨을 때 대표가 바로 독일어로 인사를 건넨다면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래서 외국인 단골 고객도 많은 편입니다.

앞으로의 이태원 지역의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태원의 특성상 코로나 기간 수많은 공간들이 영업을 중단하거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력이 가득했던 많은 공간들을 이젠 볼 수 없게 된 것이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그런 공간들에서 엿볼 수 있었던 이국적이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면면은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미군 기지 공원화, 지역 재개발 등 수많은 변수를 앞두고 있지만 적어도 프랜차이즈 점포 가득한 여느 동네처럼 평범해지진 않았으면 합니다.

이태원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도 들려옵니다. 인근 권역에 계신 입장에서 코로나 시기를 지난 뒤 최근 이태원의 동향에 대해 직접 경험하신 바 또는 생각이 궁금합니다.

마하 한남 (김동현 소장)

가까운 옆 동네인지라 이런저런 용무로 이태원을 종종 드나듭니다. 최근에는 점차 원래의 모습을 점차 회복해 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임대료가 전반적으로 너무 높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인지 공실이 많고, 아무래도 사건·사고 발생이 많았기 때문인지 다소 경직된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사건 전후로만 침체된 느낌이지 언젠가 다시 가보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어요. 마치 히어로 무비 주인공 가운데 초인적인 재생력을 지닌 캐릭터처럼 회복 능력이 대단한 동네랄까요? 장사를 할 때 컨셉이 과해도 이태원이니까 받아들여지는 요소들도 있는데, 다른 동네에 비해 실험적인 것에 열려 있는 그런 태도가 생명력을 만들어 낸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혹시 이태원만의 관용적인 마인드를 경험하신 일화 같은 게 있을까요?

웰컴레코즈 (DJ ANDOW)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정도로 기억합니다. 제가 한창 DJ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때였죠. 그때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플레잉을 마치고 새벽에 테이블이 5개 정도 되는 조그마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거든요. 들어갔는데 한 테이블에는 게이, 다른 테이블에는 레즈비언, 또 한 테이블에는 흑인 친구들이 앉아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이지 온갖 군상들이 한 공간에 모인 모습을 보며 이게 지구촌이란 생각이 들었죠. 다른 동네에 가면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도 이태원에서는 그저 서로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느낌이 가장 생생하게 와닿았던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클럽 씬이 이태원 일대의 지역 문화를 주도했다고 보는 게 맞을까요?

웝트샵 (이석준 대표)

그렇지 않을까요? 이태원을 방문하는 목적을 생각해 보면 명확하다고 보는데요. 놀거리, 즐길 거리를 찾아서 오는 분들이 많고 그 종착지는 보통 클럽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방서 골목을 중심으로 옛날부터 클럽 씬이 형성되어 있었고 점차로 확장되어 왔잖아요. 인근의 밥집이나 술집을 드나드는 건 그런 클럽을 방문하는 손님들이고요. 이태원의 상징이기도 하고, 대표적인 콘텐츠죠.

주로 온라인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2년 동안의 코로나 사태는 역시 녹록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SCR이 전개하는 다양한 활동과 그 방향성이 코로나 전후로 바뀐 부분이 있을까요?

우사단 스튜디오에서 지금의 녹사평 스튜디오로 이전하자마자 코로나 유행이 시작되었거든요.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코로나 기간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금전적으로는 계속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요. (웃음) 당시 클럽을 비롯한 오프라인 공간들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에 SCR과 같은 채널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활동이 집중됐거든요. 그래서 그 기간 동안에는 클럽 파티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기도 했는데, 엔드 코로나를 맞아서 페스티벌을 비롯해 더욱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태원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장기간에 걸친 셧다운의 후유증인지 사회·문화 전반적으로 다소 경직된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울프소셜클럽을 어떤 공간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신가요?

울프소셜클럽 (김진아 대표)

무언가를 억지로 시도하기보다는 지금의 모습과 가치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보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새로운 걸 추구하고 쫓아가길 좋아하는 한국에서 뜻하는 바를 유지하며 장사하는 건 정말 쉽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물론 가만히 머물러 있겠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방문해 주시는 분들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소리 없는’ 노력과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뤄지거든요. 그렇게 사람들이 울프소셜클럽에 기대하는 바에 변함없이 부응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결같은 공간이고 싶어요. 울프소셜클럽처럼 철학과 관심사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공간일수록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거거든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기로 한 시간에는 문을 열어두는 것, 영업시간에는 별다른 걱정 없이 당연히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 그런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의 이태원 지역의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헬카페 (임성은 대표)

이태원은 오랜 기간 사회적인 소수자들을 위한 숨구멍 같은 창구였잖아요. 앞으로도 그런 지역으로 남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이주화 이맘)

이후 리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부산성원을 지었고, 전주성원은 이집트 정부, 경기광주성원은 쿠웨이트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6년까지 전국에 5개의 이슬람 성원이 만들어졌고, 무슬림 숫자도 1만 명 이상 늘어난 상황에서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죠. 이 시기 한국 경제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역으로 코리안 드림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따라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 노동 인력들이 역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한국 내 무슬림 인구가 20만 명을 바라보는 수준으로 성장하다 보니 5개 성원만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렵 노동자들이 밀집한 산업 공단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예배소가 생겨났고, 점진적으로 이슬람교가 뿌리를 내리던 와중에 2000년대 초반 이슬람을 이용한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태원 얘기로 넘어가볼까요? 대략 이태원을 언제부터 드나들기 시작하셨나요?

나나영롱킴 (나나영롱킴)

고등학교 때였어요. 저는 부산 출신인데 아무래도 LGBTQ+ 커뮤니티 자체가 서울에 비해 엄청 작다 보니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무 아저씨 같지만 제가 PC통신 세대여서 천리안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가 서울에 게이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는 걸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은 친구랑 한번 가볼까 생각해서 밤에 이태원을 가봤는데 정말 길거리에 트랜스젠더 누나들이 오가고, 남자들끼리 부둥켜안고 지나가고, 그런 바이브를 경험하게 된 거죠. 그때 ‘아, 진짜 서울로 와야겠구나’ 결심했고, 동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사실 카페란 지극히 반복적이면서도 고독한 노동을 감당해야만 하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처음 목표하신 기간 대비 굉장히 오랜 기간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롱런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헬카페 (임성은 대표)

당연하게도 많은 분들께 사랑받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죠. 사실 큰 뭔가를 생각하며 카페를 해온 건 아니고, 바둑돌 하나씩 두다 보니 1,000승을 거둔 조훈현 기사님의 일화와 같은 느낌인데요. 매일매일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오픈하고, 마감하는 반복적인 일을 하는 와중에도 오시는 분들이 매일매일 다르고 커피 상태가 매일매일 다르잖아요. 그런 부분이 단순하고 지겨울 수 있는 일보다 재밌으니까 1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PDF 서울과 함께할 이태원 지역이 이런 모습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PDF 서울 (이승현 대표)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그런 동네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괜찮은 디자인 숍과 바 또는 라운지, 그리고 클럽 등 다양한 개성과 감도를 갖춘 공간들이 공존하며 문화적으로 건강한 생태계를 형성해 나갔으면 합니다.

PDF 서울이 문을 연 이후로 어느덧 반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직접 공간을 운영하며 경험하신 이태원은 어떤 동네였나요?

PDF 서울 (이승현 대표)

공간을 운영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예상한 대로 한국 사람만큼 외국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고, 20대 초중반의 소위 힙스터분들도 많이 방문하고 계십니다. 원래부터 이태원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등의 이미지를 그대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중동 붐’으로 기업과 노동자들이 파견되었던 시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이주화 이맘)

맞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중동 외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1967년에 정부 차원에서 배려의 일환으로 한국 이슬람교 재단에 서울중앙성원 부지를 희사했습니다. 여기에 이슬람 국가들이 건립 비용을 지원하였고, 1976년에 성원이 개원하게 되었죠. 바로 이 시기쯤 이른바 ‘석유 파동’으로 인해 중동 국가들의 건설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국 기업과 노동자들이 대거 진출한 중동 붐이 일었고요. 이 시기 정부는 성원과의 협력하에 노동자에 대한 이슬람 문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를테면 중동 이슬람 국가에 가서 일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일종의 소양 교육이 진행된 것이고요.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에 파견되는 노동자들의 경우 이슬람교 입교가 조건이었기 때문에 한국인 신자 수가 크게 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무대에 올리신 작품은 각각 서로 다른 줄거리와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작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중시하는 덕목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앞서 보광극장을 창단한 인원들이 이른바 1기 멤버라면 제가 대표로 이어받아 활동하기 시작한 지 이제 1년 반 정도가 됐거든요. 그 기간 동안 초점을 맞춘 건 아무래도 저희가 가진 지역 극장이란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구현하는 여러 가지 작업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을 위한 예술 활동의 느낌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지역 주민 분, 더 많은 시민 분들과 소통하는 것을 목표로 공연을 만들고 있고요. 물론 그 과정이 녹록지 않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전자 음악을 콘텐츠로 삼는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장소성을 지닌 클럽과 라디오 스테이션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도 존재할 것 같습니다. 라디오 스테이션을 통한 활동과 클럽 베뉴의 활동 간에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할까요?

앞선 답변과 일부 동일한 맥락인데요. 방문객을 상대하는 클럽 베뉴들은 부득이하게 대중적인 인기 장르 위주로 음악을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디펜던트 라디오는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장르를 자유롭게 선곡할 수 있죠. 다른 한편으로 SCR은 훌륭한 스튜디오 프로듀서진을 보유하고 있고 상당한 퀄리티의 라이브 연주 콘텐츠, 그중에서도 생소한 장르의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음악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트렌드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음악 그 자체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클럽에서는 현실적인 여건상 그렇게 하기 어렵지만, SCR에서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바버샵은 기본적으로 헤어 스타일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지만, 삶을 가꿔 나가는 태도를 가진 분들이 모이는 일종의 취향 공동체 같다는 인상을 받고는 합니다.

블리스풀 바버샵 (동혁, D2, 선우 원장)

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진 않지만, 되려 바버샵이 매니악한 공간이라고 생각해서 쉽게 방문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짧은 머리만 한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의 공간일 것 같다는 등의 선입견을 가진 분들도 많죠. 물론 바버샵의 기원을 생각하면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요즘은 바버샵도 진화하고 있거든요. 바버들이 긴 머리 스타일링이나 염색, 펌 등을 배워 다양한 스타일링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점, 다양한 스타일링이 가능하다는 점, 나아가서는 세심한 일대일 서비스를 통해 내적 친밀감을 쌓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맘 편히 방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역 내부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많은 이들이 이태원을 가리켜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코로나 시기를 지난 뒤 최근 이태원의 동향에 대해 직접 경험하신 바 또는 생각이 궁금합니다.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실생활에서 가장 와닿는 건 인근 감자탕 맛집이 24시간 영업을 종료했을 때였어요. 원래 보광동은 이태원에서 놀던 분들이 밤늦게 넘어와서 식사하며 3차, 4차로 노는 동네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발걸음이 드물어지다 보니 심야에 운영하는 식당들이 없어졌고, 그럴 때마다 인적이 드물어진 이태원의 근황을 체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귀가할 때 이태원을 지나서 가거든요. 해밀톤호텔 골목에서 참사가 발생한 직후 녹사평역에 마련된 분향소 주변을 오갈 때면 정치적인 다툼이 너무 역력한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왜냐면 희생자분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원색적인 현수막이 정말 많이 걸렸거든요. 이태원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고 외부에서 방문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만약 그분들이었다면 현수막을 보고는 굉장히 불편한 마음이 들 것 같았어요. 여러모로 당시 가장 아쉬웠던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말씀해 주신 이태원 지역의 특성이 웝트샵 위치를 선정할 때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웝트샵 (이석준 대표)

사실 이 공간에 자리 잡은 과정은 지역 특성과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건 아니었습니다. 웝트샵을 운영하기 전 다른 일을 할 때 이태원을 자주 드나드니 먼저 한남동에 사무실을 구했는데요. 한 1년 정도 지금의 웝트샵 자리가 비어있는 거예요. 근데 전면이 널찍하게 트여 있고 구조적으로도 괜찮아 보여서 관심이 갔고 결국 공간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남동이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였던 것 역시 마음에 들었고요.

‘보광극단’이 아닌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활동 분야를 연극에 한정하지 않고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자는 취지였습니다. 극단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연극에 집중하는 팀으로 인식되는 반면, 극장은 영화와 연극 양쪽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잖아요. 창립 초기에는 자체적으로 공간을 운영하고 있진 않았지만 앞서 설명한 취지를 담아 ‘보광극장’으로 명명했습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이태원은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할까요?

웰컴레코즈 (DJ ANDOW)

오랜 기간 이태원을 상징해 온 해밀턴 뒷골목만 가봐도 아시겠지만, 주점 위주의 평범한 상권이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제 여느 동네랑 다른 게 없는 것 같아서 다소 아쉬워요. 예전처럼 이태원 하면 떠오르는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소규모 공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VISLA FM, QUEST 등 라디오와 공간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계십니다. 각각의 미디어와 채널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비슬라 (권혁인 편집장)

VISLA FM은 지역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서울의 음악적인 색깔을 더 다채롭게 하고자 만든 플랫폼입니다. 디지털 피드에 떠도는 수많은 아티스트의 이름,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의 볼륨을 더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물론 이 도시의 음악적인 흐름 사이에 VISLA FM이라는 주파수가 존재하길 바랍니다. QUEST는 사무실을 옮길 때 재밌게 생긴 공간 구조에 매력을 느껴 갑작스레 떠올린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손님과 친구들을 맞는 VISLA만의 방식이자 응접실의 개념인데 작은 바(Bar), 쉼터였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재는 VISLA FM 스튜디오와 QUEST로 운영 중입니다.

길종상가 박길종 대표는 보광동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헬카페를 ‘강배전 원두 풍미에 눈을 뜨게 해준 곳’으로 표현했습니다. 헬카페가 지향하는 커피 맛은 무엇인가요?

헬카페 (임성은 대표)

헬카페를 오픈할 무렵에는 산미가 두드러지는 스페셜티 커피가 한창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저와 동업하는 권요섭 대표 모두 그런 맛이 취향에 맞지 않더군요. 그리고 천편일률적인 맛을 내기보다는 다른 걸 해보자는 다소 청개구리 같은 심리도 있어서 업계의 주된 흐름과는 다르게 강배전 커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진하고 쓴맛을 좋아하는데, 사실 한국어에서 ‘쓴맛’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잖아요. 하지만 다른 여러 가지 맛 사이에서 쓴맛의 밸런스를 적절하게 맞춰주면 묵직하고 기품 있고 진중한 느낌을 낼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 헬카페가 지향하는 커피 맛은 진하면서도 복합적인 매력을 지닌 쓴맛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의 이태원 지역의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보광극장 (강민수 대표)

보광동에서 느끼고 있는 이런 다양성을 이태원 역시 가지고 있는데, 그런 면면이 더욱 깊게 뿌리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역량을 키우고 각자의 생업이나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공기관의 관심과 지원이 적절하게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태원 지역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정말 많은 이들 사이에서 제법 탄탄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현황에 관심을 갖고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졌으면 해요. 그와는 별개로 저희 보광극장 역시 지역 예술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고요.

그렇다면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에서 이태원이란 지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웰컴레코즈 (DJ ANDOW)

요즘은 다소 부침이 있지만, 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문화가 포용되는 곳.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곳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