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가구나 오브제를 제작하는 가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계시지만, ‘가상의 상가’ 컨셉은 여전히 신선합니다.
그동안 제가 해왔던 일들이나 지금 하는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돌아보면 가구 브랜드의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 영역에 걸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작업 분야를 상가 안에 입주한 여러 상점에 빗대어 표현하고자 했고, 길종상가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길종상가의 2023년 근황이 궁금합니다.
길종상가(박길종 대표)
가구 제작이나 공간 디자인, 미술관 또는 박물관과의 협업 등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계속 해나가고 있고요. 기존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공간 디자인 관련 프로젝트가 늘어났는데, 매년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상황입니다.
가구, 오브제, 인테리어를 아우르는 길종상가의 다양한 창작물을 하나로 아울러 정의하긴 쉽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유머러스한 위트가 느껴집니다. 구성원 공통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일까요?
아무래도 주문 제작을 기본으로 삼고 있기도 하고, 저희 팀의 성향상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기보다는 다양한 변화를 주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누가 봐도 길종상가가 만들었을 것 같은 느낌을 제공하면서도, 때론 이게 정말 길종상가의 제작물이 맞는지 싶을 정도로 정의하기 어려운 느낌을 유지하고자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 인상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심미적인 아름다움 이외에도 실용적인 기능성을 고려하신 부분이 엿보입니다. 길종상가가 주문에 응하고 무언가를 제작할 때 중시하는 포인트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정과 예산, 장소, 세 가지 요소를 두고 주문자와 소통해 나가면서 현실적인 협업의 틀을 만들어 나가는 걸 가장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의뢰가 보통 3~4개월 전에 연락이 오기 때문에 저희 내부 스케줄을 고려하면 소재, 가공 방식 등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제작 가능한 방안을 제안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에 더해 컨셉에 대한 상호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주어진 예산안 내에서 실현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소재를 해체하고 조합하여 독창적인 결과물로 완성하시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영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얻고 계신가요?
이곳저곳 산책하는 길 위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는데요. 특히 동네 골목길에 계신 어르신들께서 갖고 나와 앉아 계시는 의자나 사용하시는 물건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등받이가 부러진 의자를 끈이나 철사를 덧대어 수선하신 모습을 보면 생활에서 나오는 재료들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방식이 작가들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이나 생각을 적어뒀다가 어떻게 이미지로 구체화할지 천천히 생각해보곤 합니다.
길종상가의 분기점 중 하나였던 ‹이태원 주민일기›에도 일상적인 소재를 해체하고 조합하는 과정이 등장합니다. 이태원, 정확히는 보광동에서 지내며 작업하시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2008년 보광동에 정착했습니다. 원래는 당고개 인근에서 지내다가, 서울 중심부로 옮기고 싶던 차에 입지 대비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찾은 거죠. 보광동 집도 작업실을 겸하고 있어서 원래부터 이런저런 가구나 물건들을 만들다가, 이후에는 우사단길에 친구들과 작게 공간을 얻어서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인데 임대료가 30만원~40만원 정도였거든요.
‹이태원 주민일기›에는 어떤 계기나 과정을 거쳐 참여하시게 된 건가요? 함께 참여하신 분들과의 교류, 그리고 할머니와의 경쟁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태원 주민일기›의 경우 우사단길에 작업실 겸 매장을 두고 활동할 때 기획자 분들께서 공간을 보시고 좋은 제안을 주셔서 수락했습니다. 몇 개월 정도의 기간을 두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분들과 만나 밥을 먹거나 소통하면서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고요. 인근에는 조그만 수레나 유모차를 개조해서 폐지나 재활용품을 수거해 판매하는 분들이 많으셨는데, 그런 분들보다 앞서 물건을 수거해서 재밌는 걸 만들어본다는 취지로 ‘할머니의 경쟁자’란 타이틀을 정했습니다. 물건을 가지고 가려다 주변을 보면 할머니가 서계시는 그런 순간들이 기억에 남네요.
이후에 문을 연 길종상가 첫 쇼룸은 지금 ‘우사단길’로 널리 알려진 지역과 가까웠습니다. 당시 인근 동네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2010년 이전에는 오래된 집이 많고 작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펼쳐진 여느 동네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에는 디자이너, 아티스트, 뮤지션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렵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페이스북,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발전해 나가면서 많은 분들 사이에서 동네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 나갔고, 이런 소식을 놓치지 않는 잡지사들을 통해서도 조명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어느 순간 가게들이 하나둘 생겨나며 동네가 와글와글해졌습니다.
‘용산01’번 마을버스를 타고 있으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피부색도, 연령대도 다양한 외국인들과 함께 몸을 싣고 계신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역의 대표적인 특색으로 여겨지는 다문화의 면면을 어느 정도로 체감하실 수 있었나요?
인종이 다른 분들도 다들 한국 문화에 익숙해서 마을버스에서 어르신들께 좌석을 양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요. 길을 걷다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쳐다보면 서로 다른 인종의 아이들이 한국어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이곤 했습니다. 외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앉아 있었고, 그런 다문화의 면면이 동네에선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태원을 가리켜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제는 한 발 떨어져 소식으로나마 듣고 계실 이태원의 요즘에 대한 견해가 궁금합니다.
사실 이태원의 권역이 더욱 넓어진 느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이태원역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몰렸다면. 요즘은 한남동 일대로 이런저런 공간이나 콘텐츠가 많이 옮겨갔다고 할까요?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특히 전국에 ‘-리단길’을 퍼트린 근원이 다름 아닌 경리단길인데 여전히 건물주와 상인 사이 상생할 수 있는 정책적인 방안은 요원한 것 같아 다소 아쉽기도 합니다.
이태원의 한 시기를 몸소 경험하신 입장에서, 앞으로 이태원의 지역 문화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희망하시는 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태원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쳐온 미군 부대도 거의 철수가 완료되었고, 이태원도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이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오랜 시간 지역을 지켜온 양복점을 비롯한 상점들이 조금 더 명맥을 유지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서는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이나 생동감이 더욱 선명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