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성원은 어느덧 설립 50주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 내 이슬람교의 역사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슬람 문화권과의 교류는 고대 국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한국 내 이슬람교 역사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보통 6.25 전쟁을 기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참전한 16개국 UN군 가운데 터키군이 있었고요. 전쟁 중에 직접적인 선교를 하진 않더라도 이슬람 신앙에 기반을 둔 일상적인 종교 활동을 했겠죠? 그걸 계기로 한국 최초의 입교자들이 생겨났는데 그걸 이슬람교 전파가 시작된 일종의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1970년대까지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이뤄지지 않던 와중에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자세로 중동 외교에 임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이슬람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중동 붐’으로 기업과 노동자들이 파견되었던 시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중동 외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1967년에 정부 차원에서 배려의 일환으로 한국 이슬람교 재단에 서울중앙성원 부지를 희사했습니다. 여기에 이슬람 국가들이 건립 비용을 지원하였고, 1976년에 성원이 개원하게 되었죠. 바로 이 시기쯤 이른바 ‘석유 파동’으로 인해 중동 국가들의 건설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국 기업과 노동자들이 대거 진출한 중동 붐이 일었고요. 이 시기 정부는 성원과의 협력하에 노동자에 대한 이슬람 문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를테면 중동 이슬람 국가에 가서 일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일종의 소양 교육이 진행된 것이고요.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에 파견되는 노동자들의 경우 이슬람교 입교가 조건이었기 때문에 한국인 신자 수가 크게 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후 리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부산성원을 지었고, 전주성원은 이집트 정부, 경기광주성원은 쿠웨이트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6년까지 전국에 5개의 이슬람 성원이 만들어졌고, 무슬림 숫자도 1만 명 이상 늘어난 상황에서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죠. 이 시기 한국 경제가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역으로 코리안 드림이 생겨났습니다. 이에 따라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 노동 인력들이 역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한국 내 무슬림 인구가 20만 명을 바라보는 수준으로 성장하다 보니 5개 성원만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렵 노동자들이 밀집한 산업 공단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예배소가 생겨났고, 점진적으로 이슬람교가 뿌리를 내리던 와중에 2000년대 초반 이슬람을 이용한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이슬람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일련의 테러와 전쟁이 발발했죠.
가장 큰 사건은 9.11 테러였습니다. 그 결과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요. 한국에서는 자이툰 부대가 평화유지를 위해 파병되었고, 이후에는 김선일 사건이나 샘물 교회 사건 등이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 안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부정적인 시선이 모두 생겨났고요.
소위 이슬람교에 대한 두려움은 낯섦과 무지로부터 비롯되기도 합니다. 말씀해 주신 굵직한 사건들이 이슬람의 이름 아래 전개된 영향도 있겠고요.
이슬람에 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식어가 ‘오해와 편견’입니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써 전 지구적인 이웃 종교로 널리 자리 잡고 있고, 다른 무엇보다도 평화와 평등의 가치를 설파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가치가 어느 국가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무슬림이 생겨나고 점차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죠. 이러한 교리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이슬람교는 오히려 유연하고 변화에 적극적인 종교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해를 통한 공존을 도모하는 일종의 종교적 성숙기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일하기 위해 정착한 무슬림들의 한국 생활이 10년 차, 20년 차로 접어드는 시기이기도 하잖아요. 그 무슬림들은 한국 국적을 받기도 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기도 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3세대에 해당하는 자녀들 역시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춘 채 문화를 체득했고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와 무슬림 모두 한국 사회에 동화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중앙성원은 이태원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지켜봐 왔습니다.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태원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1990년대까지도 성원 주변은 소위 ‘텍사스촌’으로 불리는 미군 대상의 위락지구였습니다. 이슬람 지구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도 아닌 다소 험한 동네의 느낌이 강했죠.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은 이슬람 성원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슬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특히 이슬람권 국가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공관과 그 공관에서 일하는 공관원, 상사 주재원 등이 인근 지역에 다수 정착했습니다. 아울러 미군 부대 이전이 진행되면서 이태원 소방서부터 성원까지 오는 길에 가득했던 위락 시설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이슬람 관련 식당이나 상점이 채웠는데요. 결과적으로는 무슬림들이 종교 활동차 성원을 방문했다가 인근 식당을 이용하거나 식료품을 구매하는 등 일종의 상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구청 차원에서도 이슬람 거리를 조성한 뒤 인근 환경을 정비하기도 했고, 무슬림 해외 관광객 사이에서는 성원 주변 지역이 필수 관광 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기도 합니다.
성원이 종교 시설로만 기능한다기보다는 마치 무슬림 생활의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네요.
합동 예배가 있는 금요일마다 정말 많은 무슬림들이 성원을 방문합니다. 평균적으로 1,200~1,300명 정도가 방문하고 있고요. 1년에 두 번 있는 축제 예배 때는 3,000~4,000명씩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성원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겠고요. 커뮤니티의 구심점과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근에서 친숙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고향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모국어도 자유로이 쓸 수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그런 무슬림 타운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이태원은 코로나를 비롯해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겪어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지역의 상황에 대해 들으신 바 또는 체감하시는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주로 성원 안에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뉴스에서 접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듣거나 체감하는 바가 있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근에 정착해 생업에 종사하는 무슬림 가운데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코로나가 종식되고 조금 숨통이 트일 만할 무렵 큰 사고가 있었고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내고 있는 것 같고요. 아무래도 종교의 근원적인 역할 자체가 예배하러 와서 축복을 나누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힘겨운 상황과 별개로 밝은 모습으로 예배에 임하고 가는 모습을 볼 때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서울중앙성원이 앞으로 이태원 지역에서 어떤 곳으로 남기를 바라고 계신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원 주변이 이슬람 문화 명소로서 자리 잡는 건 유흥 위주의 이태원에 또 다른 요소를 더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앞으로도 국내에 거주 중이거나 방문하는 무슬림들을 위한 보금자리로써 제 역할을 다했으면 합니다. 아울러 성원 인근 지역이 재개발을 추진 중인데요. 언젠가 이 구역이 정비되고 나더라도 다소 낡은 모습의 성원이 기존처럼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한국의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중추적인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